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피아노를 가르치고 음대 입시생들을 지도하면서, 처음에는 그저 '타고난 재능이 좋은 학생'이 가장 빨리 성장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입시생들의 합격과 불합격을 곁에서 지켜보며 제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재능보다 훨씬 무서운 건 따로 있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웃으며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고, 남들보다 독보적으로 빠르고 깊게 실력이 늘었던 학생들에게는 아주 명확하고 공통적인 습관이 있었습니다.
지나온 시간 속에서 제 기억에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세 가지 장면을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1. 질문을 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과 싸워본' 학생
저희 학원 학생들은 저를 농담처럼 '레슨실 파수꾼'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제가 거의 하루 종일 레슨실에 머물다 보니, 아이들은 꼭 정규 수업 시간이 아니더라도 궁금한 게 생기면 자유롭게 찾아와 질문하곤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질문을 '많이' 한다고 해서 무조건 실력이 빨리 느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정말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학생들은 질문하는 방식부터 달랐습니다. 그들은 질문하러 오기 전에 반드시 혼자서 한참 동안 악보와 씨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가끔 어떤 학생은 연필로 본인이 고민한 내용과 해석을 빼곡하게 적어둔 악보를 들고 와서 이렇게 묻곤 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여기까지는 이렇게 해석해서 써 봤는데요. 이 다음 부분부터는 아무리 생각하고 조합해 봐도 음악적 아이디어가 잘 생각이 안나요. 여기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저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속으로 무척 기쁩니다. 이미 혼자서 수없이 고민하고, 자기만의 시도를 해본 뒤에 도저히 안 되는 지점을 정확히 짚어서 가져온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아무런 고민 없이 악보를 펼치자마자 "선생님, 이거 내청이 잘 안돼요. 그 다음은 어떻게 써요?"라고 묻는 학생들에게는 일부러 바로 답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실제 시험장과 무대 위에는 선생님이 같이 들어가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험장에서 외롭게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은 학생 자신입니다. 혼자 고민해 본 사람만이 선생님의 조언을 들었을 때 "아, 그렇구나!" 하고 자기 것으로 흡수할 수 있습니다.
2. 귀가 좋은 게 아니라, '좋은 귀를 만드는 습관'을 가진 학생
레슨 시간에 제가 직접 더 좋은 음악적 방향의 시연을 보여주고 소리의 방향을 아무리 강조해도, 학생들은 레슨실 문을 나서는 순간 생각보다 많은 것을 잊어버립니다. 사람의 귀와 기억력은 생각보다 불완전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학생들에게 항상 레슨 내용을 녹음하고 복습하라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 녹음을 활용하는 방식에서도 실력 차이가 극명하게 갈립니다.
예전에 수시 입시를 준비하던 한 학생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 학생은 집에 가서 녹음된 제 연주나 피드백을 틀어놓고 공부하다가, 조금이라도 확실하지 않은 음이나 멜로디 흐름이 나오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녹음을 멈추고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 한 음, 한 음 직접 손가락으로 눌러가며 소리를 확인해서 노트에 적었습니다.
이 학생은 음감이 좋지 않은 학생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미련할 정도로 답답하고 느린 작업이었습니다. 남들이 레슨을 전체적으로 받고 적당히 수정할 때, 그 학생은 몇 마디를 가지고 몇 십 분씩 소리를 대조하고 있었으니까요.
그 학생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해 수시에서 무려 5개 대학교에 동시에 합격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아이를 보고 "타고난 귀가 좋은 것 아니냐"고 말했지만, 곁에서 지켜본 저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타고난 귀가 좋았던 게 아니라, 좋은 귀보다 더 좋은, 지독하고 정직한 습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3. 무작정 버티기보다 '15분의 몰입'을 선택할 줄 아는 학생
연습실에 오래 앉아있다고 해서 연습량이 비례해서 늘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멍하게 앉아있는 5시간보다, 단 30분이라도 뇌가 깨어있는 상태에서 쏟아붓는 집중력이 훨씬 무섭습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피아노 앞에 앉아있다가 지친 표정으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저 지금 너무 졸리고 집중이 안 되는데... 딱 15분만 자고 다시 시작해도 될까요?"
저는 망설임 없이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 학생은 휴게실에서 딱 15분 동안 깊게 잠을 자고 일어나더니, 찬물로 세수를 하고 와서 피아노 앞에 다시 앉았습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 뒤로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엄청난 몰입도로 연습을 이어갔습니다.
반대로 졸음을 참고 무조건 버티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게 가장 안타까웠습니다.
한 번은 너무 졸린 상태로 새벽까지 과제를 하고 온 학생이 있었는데, 악보를 보자마자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작곡 과제는 중간부터 악상이 끊긴 것처럼 낙서하듯 적혀 있었고, 화성학도 앞뒤 진행이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금지 진행도 여러 군데 보였고, 막상 제가 "여기는 왜 이렇게 풀었어?"라고 물으니 학생도 한참 악보를 보다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도 기억이 안 나요."
그 말을 듣고 저는 오히려 과제를 덮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끝까지 버텨서 레슨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레슨의 질도 떨어지고, 학생도 제대로 배우지 못합니다. 결국 그날은 과제를 끝까지 하는 것보다 집에 가서 푹 자고, 다음 날 맑은 정신으로 다시 해오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이후부터 저는 학생들에게 졸음을 무조건 참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쉬는 것이 공부다.'라고 말해 주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잠을 이기려고 무작정 버티는 것보다, 자신의 컨디션을 스스로 판단하고 다시 집중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 훨씬 중요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4. 핑계 대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끝까지 찾던 학생
입시는 생각보다 긴 싸움입니다.
몇 달, 길게는 1년 넘게 준비하다 보면 몸이 아픈 날도 있고, 시험을 망쳤다고 느끼는 날도 있습니다. 그럴 때 학생들의 태도는 정말 크게 갈립니다.
예를 들어 실기 시험을 보고 나면, 어떤 학생들은 그대로 집으로 돌아갑니다.
시험이 끝났으니 오늘은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유독 실력이 빨리 늘었던 학생들은 조금 달랐습니다.
시험을 마치고 레슨실로 와서는 아직 긴장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선생님, 오늘 이 부분에서 갑자기 머리가 하얘졌어요."
"교수님이 앉아 계신 걸 보니까 평소보다 템포가 빨라졌던 것 같아요."
"다음 시험에서는 첫 음을 조금 더 천천히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누가 시켜서도 아니었습니다.
시험이 끝난 직후의 감각을 잊기 전에 스스로 복기하고, 다음 시험에서는 어떻게 바꿀지 이야기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대화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시험은 이미 끝났지만, 그 학생은 다음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니까요.
기억에 남는 학생이 한 명 더 있습니다.
입시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사랑니를 뽑았던 학생이었습니다.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습니다.
저는 당연히 쉬라고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은 레슨실에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오늘은 많이 못 할 것 같아요.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고, 너무 아프면 그때 집에 가서 쉬겠습니다."
결국 평소보다 훨씬 적은 양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날 얼마나 많이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몸이 불편한 상황에서도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보겠다'는 그 태도가 인상 깊었습니다.
물론 아프면 무조건 참고 나오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충분히 쉬어야 할 때는 쉬는 것이 맞습니다.
다만 제가 오랫동안 학생들을 보며 느낀 것은, 실력이 빨리 늘었던 학생들은 늘 핑계를 찾기보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찾으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그 작은 태도의 차이가 몇 달, 몇 년이 지나면 생각보다 큰 실력 차이를 만들어냈습니다.

마치며...
실력이 가장 빠르게 느는 학생들은 어떤 특별한 비법이나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 답을 듣기 전에 먼저 자기 생각으로 고민해 보는 고집,
-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한 음씩 짚어가는 정직함,
- 그리고 쉬어갈 때와 몰입할 때를 아는 자제력.
결국 실력은 피아노 앞에서 보낸 '실제 장면들'이 쌓여 만들어집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연습실에서 악보와 외롭게 씨름하고 있을 모든 입시생들이, 자신의 고민과 시간을 믿고 정직하게 나아가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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